우란푸통 초원의 빛 (10)호텔 식당에는 근사한 조식 뷔페가 차려져 있지만 그림의 떡이다. 아침에는 음식이 넘어가지 않아 물과 커피만 마시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왕 조식을 먹으러 왔으니 우유와 삶은 달걀을 챙긴다. 유목의 나라 몽골에 아직 발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우유가 맛났다. 음료 기계에 ‘커피(咖啡)’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커피’의 실체는 뿌옇고 연한 갈색 음료였다. 색깔만큼이나 맛도 어중간했다. 문득 믹스커피 맛은 한국이 세계 최고일 듯싶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예전에 일본에서 나고 자란 지인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커피가 아니라 다른 음료라고 생각하면 괜찮은 맛이야.” 사람들은 비교적 시간....... 
Sun, 04 Oct 2026 22:18
우란푸통 초원의 빛 (9)2026년 8월 20일 부산한 소리에 잠을 깼다. 룸메이트들은 벌써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가 현실이라기보다는 연극 같다. 모녀의 대화는 정말이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다. 그동안 외운 단어와 익힌 문법이 무용지물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버린다. 내 몸은 침대에 말 그대로 ‘파묻힌’ 듯하다. 마치 환생이라도 한 듯 온몸이 무겁고 정신이 몽롱하다. 그래도 이불 속에서 꾸물대는 낙(樂)을 바로 포기한다. 미적대는 잠결의 손길을 뿌리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침 여섯 시, “자오안(早安)!” 모녀가 아침 인사를 받아준다. “자오안(早安)!” 가이드가 내게 노부인과 산책을 나가라고 권한다. 칠십....... 
Fri, 02 Oct 2026 11:34
우란푸통 초원의 빛 (8)청더의 호텔 방은 깨끗하고 널찍했다. 하얀 시트, 하얀 이불, 하얀 베갯잇…… 타불라 라사(Tabula Rasa)가 여기 있다. 두꺼운 커튼이 잘 갈무리해주는 어둠 속에서도 잠이 오지 않는다. 이른 새벽부터 움직였으면 당연히 깊은 잠에 곯아떨어져야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잠은 걸핏하면 초대를 무시하는 못된 손님이 되어버렸다. 성질을 누르고 고이 모시려고 해도 제멋대로 왔다가 제멋대로 가버린다. 가이드 모녀의 코골이 소리가 부러웠다. 처음에는 얌전하고 무난하게 베이징(北京)을 다녀오자고 마음먹었다.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데 혼자 단체관광에 섞여 길을 떠난다고? 두 시간짜리 영화나 전시 보기도 힘들어하면서 내몽골까지 버스를 타....... 
Wed, 30 Sep 2026 14:31
우란푸통 초원의 빛 (7)철커덕, 모녀가 가방을 챙겨 나갔다. 넓은 호텔 방 침대 위에 다리를 뻗고 몸을 폈다. 새벽 다섯 시 반 출발 이후 열네 시간 만에 혼자 있는 시간…… 한 손으로 지엔빙 봉지를 들고, 한 손으로 지엔빙을 뜯어 먹었다. 옥수숫가루로 만든 지엔빙은 구수하고 담백하고 바삭바삭하다. 휑뎅그렁함과 맹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다. 북방의 맛이라고 멋대로 규정한다. 청더원자가일주점(承德院子假日酒店) 호텔…… ‘청더 마당에서 휴가를 보내는 호텔’일까. 중국어는 말이든 글자든, 들리는 족족 보이는 족족, 풀이하고 외우고 싶다. 소리를 하나하나 모조리 분절(分節)해서 똑똑히 알아듣고 싶다. 호텔 앞마당에 나가 별도 달도 없는 무심한 하늘.......
ue, 29 Sep 2026 12:29
우란푸통 초원의 빛 (6)일곱 시 십 분, 해가 넘어가고 어둑해지자 첫날의 길이 멈추었다. 휑하게 뚫린 공터, 배산(背山)의 거리…… 호텔 혼자 빛을 내뿜으며 우뚝 서 있다. 주변에 인공물이라고는 주차장에 세워둔 관광버스 네댓 대뿐이다. 떠나기 전에 가이드, 가이드의 모친과 함께 방을 쓴다고 Z가 말해주었다. 호텔 방으로 들어갔더니 침대가 둘이다. ‘매화와 글’ 가이드는 어느 쪽 침대를 쓰겠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나한테 제제(언니, 姐姐)라고 부른다. 나는 그녀를 똬요우(가이드, 导游)라고 부른다. 나는 그녀의 엄마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 로비에서 일을 마치고 온 그녀가 저녁 일정을 설명해준다. (그렇게 알아듣는다.) 방에서 쉬어도 좋고 산책....... 
Fri, 25 Sep 2026 16:43
우란푸통 초원의 빛 (5)점심시간은 12시 15분부터 30분간 주어졌다. 사람들이 주섬주섬 버스에 올라탔고 버스는 1시에 출발했다. 늦어진 십여 분은 인지상정을 담아내기에 적절한 길이다. 중국의 고속도로는 한국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앞으로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를 주인으로 모시는 길이다. 자동차는 내게도 주인이다. 제발 무사히 초원에 데려다 달라고 간청해야 한다. 세 시간을 달리고 다시 휴게소에 들렀다. 공간은 자동차가 점유해도 시간은 인간 신체의 생리에 따른다. 고속도로의 시공간은 공평하고 정연하다. 저녁 다섯 시, 드디어 첫 관광지에 도착했다. 청더(承德)라는 도시! 버스에서 내렸더니 여기저기 마음껏 둘러보고 오라고 한다. (그렇게 말했다고....... 
Wed, 23 Sep 2026 15:52
우란푸통 초원의 빛 (4)긴장한 탓에 감각이 예민해지고 촉각이 곤두서 있다. 머릿속은 온갖 낯선 정보의 과잉 유입으로 무질서하기 짝이 없다. 두통이 생기려는지 뒷골이 뻐근하고 배도 고프지 않다. 왕만두를 하나 들고 음식 먹는 휴게실 같은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휩쓸고 간 흔적이 질펀하게 널려 있었다. 일회용 음식 용기, 비닐봉지와 포장지, 흥건하게 남겨진 음식 등등…… 인구 5천 만인 나라에서 온 나는 새삼 14억이라는 숫자를 새긴다. 고대 인류는 패총을 남겼지만 조개는 멸종하지 않았다. 현대 인류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멸종시킬까…… 점심으로는 찐만두 딱 한 개가 딱 좋았다. 게다가 맛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뭘 먹었을까? 정.......
Mon, 21 Sep 2026 12:06
우란푸통 초원의 빛 (3)11시 25분 휴게소에 들렀다. 40분까지 버스로 오라고 한다. 그러면 점심은? 궁금해도 딱히 묻지 못한다. 12시 15분 다른 휴게소(轻纺服务区)에 내려준다. 큼직한 찐만두(大包) 하나를 먹었다. 중국어를 거의 못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도 드문드문 한두 단어쯤 알아들을 때가 있다. 정 궁금하면 가이드에게 따로 묻는데 대개는 여의찮다. 언제나 다시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이드도 따로 내게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성격인 듯하다. 말 걸기는 또 다른 모험이다. 아무도 내게 말 걸지 않는다. 가이드의 이름은 매화와 글이다. 아름다운 이름이다. 매화와 글 가이드는 열심히 일하는 튼튼한 중년 여성이다. 가이드는 늘 다른 사람과 이.......
hu, 17 Sep 2026 10:40
우란푸통 초원의 빛 (2)7번, 내 자리는 창가 쪽이었다. 짐칸에는 빼곡하게 짐이 올라갔다. 가족 단위로 떠나는 중국 여행객들은 먹을 것을 말 그대로 ‘잔뜩’ 마련해왔다. 과일이 한 가방, 과자와 음료가 한 가방, 빵과 지엔빙이 한 가방, 삶은 달걀과 옥수수가 한 가방……, 머리 위 짐칸은 꽉꽉 채워졌다. 난 먹을 것을 하나도 준비하지 못했다. 중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먹을 것을 따로 준비하라는 말은 전해 들었지만 흘려들었다. 집 떠난 나그네는 타국의 단체여행에 몸만 얹을 뿐, 다른 준비에는 힘이 미치지 못한다. 7시 반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스가 섰다. 버스를 찾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버스 외양을 외워 두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달.......
hu, 10 Sep 2026 00:15
우란푸통 초원의 빛 (1)8월 19일 날은 맑았다. 택시 안에서 날이 밝아오는 것이 보였다. 빛이 어둠을 밀어냈다. 이곳은 산둥성 르자오시(日照市), 해가 제일 먼저 뜬다고 한다. 5시 10분 르자오시 시청 앞에 도착하니 버스가 줄지어 서 있다. 나를 태워야 할 버스를 찾아 Z는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한다. 버스에 태우자마자 Z는 곧 집으로 돌아갔다. 중국 국내 여행사의 단체 관광을 신청해 내몽골로 떠난다. 혼자다. 중국어를 겨우 몇 마디 할 줄은 아는데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 일본에 처음 갔을 때 하토 버스를 타고 당일 여정으로 니코(日光)에 간 적이 있다. 하토 버스는 일본 국내 여행사가 운영하는 단체 관광 상품의 이름이다. 나는 그때 일.......
Mon, 07 Sep 2026 11:25
가네코 미스즈(金子みすゞ) <내가 쓸쓸할 때>내가 쓸쓸할 때 ****1903년에 태어나 1930년에 친권을 둘러싸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네코 미스즈의 작품을 일본어로 읽는 모임을 열었다. 내게는 무척 유명한 시인인데 주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듯, 아쉽게도 작은 모임으로 마무리했다. 참으로 아쉬웠다. 일찍이 일본에 거주하는 동안 나는 <明るいほうへ明るいほうへ - 童謡詩人金子みすゞ>라는 드라마를 통해 이 시인의 존재를 알았다. 메이지 시대 말기 여성 시인의 인생은 이혼의 자유도 없고 이혼을 하더라도 친권을 얻을 수 없는 비극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만 비극적 숙명을 뛰어넘으려는 듯 그녀가 남긴 동요의 면면은 한없이 맑고 투명했다. 따뜻하다가도 냉소에 넘치.......
Fri, 04 Sep 2026 20:33
[번역가의 잡담놀이] <돈가스의 탄생>을 읽습니다!안녕하세요. 2026년 9월에는 메이지 시대의 역사를 재미있게 풀어낸 책을 읽어봅니다. 돈가스의 탄생 오카다 데쓰2006뿌리와이파리 생각해보면 한 달에 적어도 한 번은 돈가스를 먹는 것 같습니다. 일본 음식이기는 해도 한국 음식으로도 정착한 이 음식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메이지 시대에 서양 문화의 유입과 더불어 갈등과 조화 과정을 통해 탄생한 일본의 대표 메뉴 돈가스! 불교의 영향으로 고기를 먹지 않던 전근대 일본은 서양과 어깨를 견주기 위해 단행한 식문화 개혁의 상징물 돈가스! 돈가스는 저절로 우연히 생겨난 먹을거리가 아닙니다. 돈가스는 근대 문명을 받아들여 강성한 국가를 꿈꾸던 일본이 어떻게 일상의 서구화를 일구.......
hu, 27 Aug 2026 10:02
고병권 <철학자와 하녀>***작년 2월에 산둥성의 어느 호텔에서 읽었는데, 시간이 이렇게 살같이 흘러갔다. 부제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이고, 제목은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가 별을 관찰하다 우물에 빠지는 광경을 트라키아 출신의 총명한 하녀가 비웃었다는 일화에서 가져왔다. 이 책의 기획 의도에 적절한 제목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옛날 관련 기사를 찾아보니 책 내용에 관한 이야기는 없고 다 제목 풀이에만 매달려 있다. 제목 붙이기는 성공한 듯하다. 철학자의 에세이는 ‘철학’ 때문에 내게 특별하다. 신축 건물이 늘어서고 8차선 도로가 뚫려 있고 거리에 인적이 드물었던 소도시(그래도 인구 약 300만), 그곳 호텔 방에 머물며 읽기에 적.......
hu, 30 Jul 2026 11:08
오드 아르네 베스타(Odd Arne Westad) <제국과 의로운 민족>**이 책의 부제는 ‘한중 관계 600년사_하버드대 라이샤워 강연’이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제국’, ‘민족’, ‘의로움’을 핵심 개념으로 역사상의 분기점이었던 14세기 원-명 교체와 조선이 사대를 통해 ‘독립’를 지켜온 관계를 개관한다. 한국은 왜 항상 독자적 국가로 유지되었고, 한국이 제국 바깥에서 정체성을 지킨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매우 흥미로운데, 솔직히 말하면 정작 궁금증을 해소할 만한 답변은 얻지 못했다. 특히 이 책에 나오는 ‘의롭다’는 말은 유교의 ‘의(義)’를 가리키는데, 어떤 의미를 띠며 현실에 작용했는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상품만이 아니라 사상도 넘나들었다. 조선 사절단은 북경에 올.......
ue, 28 Jul 2026 00:04
펑수화(彭素華) <할머니들의 비키니 여행>***우연히 도서관 서가에서 뽑아 들었다가 뜻밖에도 대만 작가의 작품이기에 한숨에 읽어버렸다. 소녀가 할머니 네 명과 여행에 나서는데, 이 여행이 가정생활에 얽매여 살던 할머니들의 첫 가출이라는 설정이다. 대만도 어지간히 고루한 가부장제 사회인가 싶다. 또한 첫사랑을 찾아가는 한 할머니의 에피소드에는 원주민과 중국인(?) 사이에 놓인 역사도 가로놓여 있었다. 어느 사회든 집단 사이의 갈등에는 대부분 혼사 장애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후반부에 가면 이 작품의 중심 주제가 ‘유방암’ 또는 여성의 삶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사춘기 소녀의 가슴과 노년 여성의 가슴이 부딪치고 감싸 안는다. 이 작품은 굳이 말하자면 청소년 문학.......
Mon, 27 Jul 2026 22:56
최실 <지니의 퍼즐>****올해 7월 <번역가의 잡담놀이> 독서모임에서 읽기로 했을 때는 청소년문학 작품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선입견이 작용하기도 했는데, 정작 작품을 다 읽고 나서는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이라는 문제틀이 새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똑똑하게 깨달았다. 실로 이 작품은 재일조선인 역사의 새 국면을 제시함으로써 신선하고도 폭넓은 시야를 제시해주었다. 과연 일본에서 삼대 문학상을 석권하며 절찬을 받았다는 사실이 명불허전으로 드러났다(제59회 군조(群像)신인문학상, 제33회 오다사쿠노스케상(織田作之助賞), 제155회 아쿠타가와상(芥川龍之介賞) 후보). 이 독서모임의 후기에는 “‘청소년의 시선’으로 ‘경계인의 현실’을 매우 박.......
Wed, 22 Jul 2026 14:23
비오리카 마리안(Viorica Marian) <언어는 어떻게 인간을 바꾸는가(The Power of Language)>***<번역가의 잡담놀이> 모임에서 이 책을 읽었다. 『언어의 본질』과 겹치는 이론과 실험이 눈에 띄기에 살펴보니, 노스웨스턴대학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마도 비슷한 시기에 일리노이주에 있는 같은 대학에서 거의 동시기에 당대 학설을 배우고 연구를 진행한 듯하다. 저자는 주로 이중언어 또는 다중언어의 필요성과 유효성을 주로 언술한다. 그러나 이를테면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한국의 조기 영어교육 열풍에 어떻게 찬성만 할 수 있을까. 영어만 강요하는 영어 유치원은 확실히 폭력적이며 어린아이의 자기표현과 자기실현을 억압하고 있다. 이 책은 다중언어 교육의 긍정성을 강조한다. 당연하게도 열심히 책을 읽고(활자와.......
Mon, 22 Jun 2026 01:35
올리버 다크셔(Oliver Darkshire) <기묘한 골동품 서점>***‘서점’이면 서점이지 ‘골동품 서점’이 뭘까 호기심에 집어 들기는 했는데, 파는 물건과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고, 먼지가 풀풀 날리며 물이 새기도 하고, 있는지도 모르던 밀실을 발견하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정신 사납고 큼큼한 미로 같은 서점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는 책이었다. 어쩐지 영국이니까 이런 곳이 있는가 싶기도 하다. 이 서점은 영국 요크에서 1761년에 설립해 현재 런던 새크빌스트리트에 있는 헨리 소서런이라는 실존하는 공간이다. 실은 이 서점의 매출이 어떻게 나고 어떻게 흑자 운영이 되는지 가장 궁금했으나 그런 정보는 책에 나오지 않았다. 몇백 년 지난 건물에 자리 잡고 월세를 내며 버티고 있는 골동품 서.......
Sun, 21 Jun 2026 20:09
강영주, 박석무(편저) <홍명희 · 정인보 : 조선적인 것의 재구성>****『임꺽정』의 작가로서 유명한 홍명희는 내게 ‘민중문학’이라는 범주 안에 있었고, 학창 시절에 『임꺽정』을 독파한 바 있으므로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 홍명희는 내가 어렴풋이 품고 있던 인상보다도 훨씬 더 깨어 있는 이상적인 지식인이었고, 격세지감을 비웃듯 시대 격차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정신으로 에스페란토어를 배웠고, 성별의 관념이나 출산과 피임에 관한 견해도 진보적이다. 특히 이태준과 나눈 대담은 솔직하고 투박한 성격을 엿보여 웃음을 자아내었다. 한편, 정인보는 옛날에 배운 시조로 기억하는 작가였는데, 이렇게....... 
Fri, 15 May 2026 23:08
궈창성(郭強生) <피아노 조율사(尋琴者)>****피아노라는 단어를 보고 무턱대고 손에 든 책이었는데, 전혀 예상 밖으로 금시초문이었던 이 타이완 작가의 이 작품을 읽고 무척이나 감동을 받았다(원제는 ‘피아노를 찾아서 떠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안정적인 구도와 섬세한 서술이 돋보이는 가운데, 비극적인 운명, 복잡한 애정의 궤적을 통해 인생의 깊이를 들여다보는 작품이었다. 「추천의 말」에는 금나라 시인 원호문(元好問, 1190~1257)의 『모어아(摸魚兒) 안구사(雁丘詞)』의 구절이 나온다. “세상에 묻노니 정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삶과 죽음을 서로 허락하는가?(問人間 情是何物 直敎生死相許)” 결국 정(情)은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깊은 심연이요, 유정물 중에서도 특.......
Fri, 08 May 2026 21:36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 <인내 상자(堪忍箱)>***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미야베 미유키가 엮어낸 미스터리 단편집이다. 출판사에서는 ‘미니 픽션 시리즈’라고 부르는데 정확한 뜻은 모르겠다. 표제작 「인내 상자」는 화재를 통해 집안의 불경한 핏줄이 밝혀지는 비극이었고, 「유괴」는 유괴해 달라는 주인집 아이를 통해 부모의 정에 얽힌 어려움이 전해졌다. 「도피」는 주군에게 명이 달린 사무라이의 애환이 느껴졌고, 「무덤까지」는 평범함으로 가장한 잔혹함을 드러내는 예리함이 있었으며, 「음모」에는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살인을 피하는 운명의 장난 같은 절묘한 우연의 힘이 기억에 남는다. 꽤 예전에 읽었는데도 이만큼 인상에 남는 작품을 썼다는 것은 역시 미야베 미유키의.......
hu, 07 May 2026 20:55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1)“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중략]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과 ‘인간’의 내포와 상반한다. 2)“한 사람이 자기 집 문을 두드리는 모든 사람을 들어오게 하여 먹요주고 재워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한 사회가 그 사회에 ‘도착한’ 모든 낯선 존재들을 ―새로 태어난 아기들과 국경을 넘어온 이주자들을―조건 없이 환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듣기 좋은 말이기는 한데 과연.......
Mon, 04 May 2026 02:00
다무라 도시코(田村俊子) <포락의 형벌>***다무라 도시코의 또 다른 작품집이다. 여기에는 「생혈(生血)」, 「미라의 입술연지(木乃伊の口紅)」, 「포락의 형벌(炮烙の刑)」, 「그녀의 생활(彼女の生活)」, 「파괴하기 전(破壞する前)」, 「산길(山道)」, 「미약한 권력(微弱な權力)」이 실려 있다. 『미이라의 립스틱』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인습을 거부하고 주체성을 찾아가는 독립적이고 자유분방한 신여성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본래 포락지형(炮烙之刑)은 은(殷)나라 주왕(紂王)이 내리던 매우 심한 형벌로서 죄인이 숯불 위에 걸쳐 놓은 기름칠한 구리 기둥 위를 걸어가는 극형이다. 그런데 이것이 일부일처제 즉 결혼한 여성이 다른 남자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을.......
Sun, 03 May 2026 15:20
정규진 <변화를 기회로 만드는 AI力>**뜻하지 않게 지인의 소개로 이 책을 읽었다. 비즈니스 업계와 관련해서는 ppt presentation 같은 것을 해본 적도 없고 무지하다고 할 만한 상태지만, AI가 워낙 뜨거운 화제인 만큼 이해가 부족해도 참고 끝까지 읽어보았다. 저자는 국내 주요 기업의 혁신 컨설팅을 26년 동안이나 수행했다고 한다. 가히 아이디어가 넘치는 책이었고, 특히 현장에서 직접 활용한 실전 프롬프트를 자료로 풍부하게 실어놓았다. 요는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 능력을 함양하는 ‘실시간 협업 파트너’로 대할 때 비로소 역량이 폭발적으로 확장된다는 데 있었고, 이러한 기본 자세를 바탕으로 AI 시대에 무엇이 중요한지 짚어주는 취지를 살펴보는 데 의.......
Mon, 13 Apr 2026 11:28
백신애(白信愛) <나의 시베리아 방랑기>***백신애는 1908년 영천에서 출생했다. 김유정, 유치환, 김정한, 임화, 그리고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 동갑이다. 오빠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에 기울었던 것 같고, 여성동우회, 여자청년동맹 같은 조직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러다가 돌연 블라디보스토크로 밀항을 시도해 시베리아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1929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최초의 여성작가가 되었고, 이듬해에 니혼대학 예술과에 적을 두었다. 1932년 귀국하고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꺼래이」와 「적빈(赤貧)」(1934) 같은 여성 리얼리즘을 확보한 작품을 써냈으나 안타깝게도 1936년 췌장암으로 요절했다. 난 여행기를 기대하고 이 책을 읽었다. 그러나 이 책은 여러 지면에 기고한.......
Sun, 12 Apr 2026 00:43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과거로의 여행>****슈테판 츠바이크는 191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그의 친구 로맹 롤랑과 함께 평화주의를 접하고 난 이후, 평생 평화주의를 주장하며 유럽 통합을 지지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히틀러를 피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 브라질로 떠났으나 전쟁과 나치즘 때문에 인류와 미래에 절망하고는 결국 1942년 자포자기의 심정을 노트에 적은 뒤 부인과 함께 약물 과다로 생을 마감했다는 최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책에는 노벨레 두 편을 실었는데, 남녀관계를 중심으로 성애와 에로티시즘을 다룬 두 작품은 과연 슈테판 츠바이크답게 심리 묘사와 서사적 구성이 뛰어났다. 정독해놓을 만한 작가다. 그는 스스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이.......
Sat, 11 Apr 2026 01:18
다무라 도시코(田村俊子) <미이라의 립스틱>***제2의 히구치 이치요라고 일컬어지는 다무라 도시코는 정결하고 담담한 히구치 이치요와 달리 감정의 핵을 붙들어 철저히 파고드는 집요함과 끈끈함을 보여준다. 그녀는 ‘신여성’으로서 굵직한 염문과 유별난 연애 사건을 일으켰고, 작가뿐 아니라 배우, 여성운동가, 매체 발행인 등으로도 활동한 정력가이기도 하다. 특히 문학사적으로는 일본의 사소설 전통을 개척한 여성작가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미 100년도 전에 예술에 투신하려는 여성의 고난, 결혼과 연애를 둘러싼 억압과 모순, 사랑을 둘러싼 개방적 태도 등 현재도 변함없이 남녀관계 문제의 본질을 이루는 이념과 현실을 핍진하게 그려냈는데, 조금도 진부하거나 상투적.......
Fri, 10 Apr 2026 00:36
김명임 외 <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신여성에 관한 자료를 통해 100여 년 전 근대 진입과 더불어 여성을 둘러싼 환경과 일상의 풍경 변화를 그려낸 책이다. 여기에는 신여성을 향한 비난과 질시, 폄하의 시선이 얼마나 격심했는지와 동시에 신여성 자신이 억압적 담론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주체의 시대적 한계도 잘 나타나 있다. 책 제목처럼 일거에 세상을 풍미하는 듯한 신여성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가정으로 돌아가거나 거리에서 사라져갔다. 아니, 실제적 의미로 거리에서 죽어갔다. 나혜석도 그렇고 다무라 도시코도 그랬다. 나는 그들이 처참하게 죽어간 자리에 또 다른 죽음이 이어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집의 안채에 갇혀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을 뿐 아니.......
hu, 09 Apr 2026 13:32
혼다 데쓰야 <스트로베리 나이트>***인터넷 연결은 확실히 독서를 방해한다. 인터넷을 끊고 오락소설을 읽었다. 처음에는 경찰서 내부에서 벌어지는 계급 갈등과 파벌주의가 얽힌 격심한 경쟁 양상이 흥미로웠으나 뒤로 갈수록 탈사회성이 두드러지는 바람에 흥미를 잃었다. ‘스트로베리 나이트’라는 살인 쇼를 설정한 것을 보고 독서의 긴장이 툭 끊어지면서 실망이 몰려왔다. ‘쇼’는 보여주기를 위한 행위이고, ‘왜’가 없는 ‘보여주기’에는 별로 맥락이 필요하지 않은 법이니까 말이다. 과연 살인 쇼를 포착해 연쇄 살인 사건의 단서가 풀리기 시작하는 대목부터 ‘설정’만 난무하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필력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문.......
Sat, 04 Apr 2026 16:17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이 책은 ‘거장이 만난 거장’이라는 시리즈로서 바그너가 베토벤을 논의했다. 우선 바그너의 필력에 놀랐고, 베토벤을 숭상하는 바그너의 마음에 놀랐다. 특히 바그너가 먼 길을 떠나 베토벤을 만나는 소설작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숭고해야 할 여정을 방해하는 인물을 만나 고전하는 주인공(바그너)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진지하게 다가왔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존경하는 사람은 자기가 숭배하는 대상을 만나기 위해 반드시 먼 길을 떠나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인생의 어디쯤 도달해 있는지 깨달을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나도 베토벤을 만나러 떠나야 할 것 같다. 그 무렵의 모차르트는 자기 내면의 천재성이.......
Sun, 22 Mar 2026 20:02
메이지 시대의 여성 작가 다무라 도시코의 작품을 읽습니다.[일본 근대문학 : 메이지 시대의 여성 작가] 2026년 3월 다무라 도시코 : 네이버 카페 2026년 3월 31일(화) 19:00 일본 근대문학 여성작가 읽기 모임을 엽니다. 히구치 이치요에 이어 다무라 도시코의 작품을 읽습니다.
Sun, 15 Mar 2026 15:53
도야 히로시(戸谷洋志)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이에서 철학하다>***저자 도야 히로시는 젊은 철학자로서 2015년 「인류의 존속에 대한 책임과 ‘신의 닮은꼴’ : 책임 윤리의 기초를 세우는 요나스를 둘러싸고(人類の存続への責任と「神の似姿」:ヨーナスの責任倫理の基礎付けをめぐって)」, 「원자력을 둘러싼 철학: 독일 현대사상을 중심으로(原子力をめぐる哲学:ドイツ現代思想を中心に)」 같은 논문으로 수상하고, 2021년『원자력의 철학(原子力の哲学)』으로 에너지포럼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리쓰메이칸대학 사람이다. 이 책의 원제는 『SNS의 철학: 리얼과 온라인 사이(SNSの哲学:リアルとオンラインのあいだ)』이고 ‘사이에서 생각하기(あいだで考える)’ 시리즈 중 하나인데, 이 책은 철학자들의.......
Sun, 15 Mar 2026 15:47
신간 <언어의 본질> 간행!
Wed, 11 Mar 2026 15:30
스즈키 유이(鈴木結生)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오가와 요코의 평처럼 이 작품은 언어가 주역을 맡고 있어 매력적이다. 마음껏 언어 유희를 즐기는 작가의 기질이 흡족하다. 스마트폰(スマートフォン) 또는 스마호(スマホ)라고 통용하는 어휘를 스마호(済補)라는 한자어로 바꾼 것은 장안의 화제다. 그래서 나도 ‘手摩透混’이라고 장난을 좀 쳐보았다. 특히 와타나베 가즈오와 오에 겐자부로의 사제지간에 슬쩍 소설 속 인물인 마나부를 끼어넣는 등 틀림없이 지어냈으리라 여겨지는데 실은 실제 있었던 일을 끌어들여 그럴듯하게 팩트를 픽션화해낸 점이 특출했다. “Die Liebe verwirrt nicht alles, sondern vermischt es.” 도이치는 눈앞에 있는 괴테의 명언을 독일어로 직역해 시험.......
hu, 19 Feb 2026 15:39
천쓰홍(陳思宏) <귀신들의 땅(鬼地方)>***타이완에서 음력 7월은 ‘귀신들의 달’이라고 한다. 특히 7월 15일 중원절은 귀문이 활짝 열려 귀신들이 대거 출몰하는 날이기 때문에 풍성한 제사상을 차려 혼귀를 달랜다고 한다. 이 소설의 화자인 텐홍은 가족과 나라를 떠나 독일에서 새 삶을 꿈꾸었으나 살인죄로 복역하고 타이완으로 돌아온다. 천씨 가족은 각기 폭력과 억압 아래 힘겹게 삶을 꾸려왔는데, 이들의 사연이 타이완의 현대사, 즉 1987년까지 장제스 일가와 국민당의 일당 독재 아래 시달려야 했다는 당대 현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타이완 문학계에는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담은 ‘동지(同志) 문학’이라는 말이 존재한다.......
Sun, 15 Feb 2026 14:30
홍한별 <아무튼, 사전>***‘아무튼’ 시리즈 기획은 독특하고 눈에 띈다. ‘아무튼’이라는 부사를 내걸어 개성이 강한 글을 선보인다는 아이디어가 꽤 괜찮은 것 같다. 이 책은 그중 하나인데, 번역하는 사람의 언어 감각 엿보기는 언제나 재미있다. 번역에 대한 문제 제기도 의미 있지만 역시 잡학에 속하는 언어 지식이 훨씬 흥미롭다. 책 구성이 널널한 편이라 아쉬움도 있었지만, 부제 ‘우리에게는 더 많은 단어가 필요하다’를 비롯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런데 ‘한심하다’를 기억해내면서 ‘What a loser’나 ‘I feel foolish’를 번역할 때 뭔가 적당한 말이 생각 안 나고 어떻게 번역해도 조금 아쉬웠던 게 떠올랐다. 그 자리에 딱 넣을 수 있.......
Fri, 13 Feb 2026 17:32
<언어의 본질>을 읽습니다[번역가의 잡담놀이] 따끈한 신간 <언어의 본질>을 옮긴이와 함께 읽습니다 : 네이버 카페 안녕하세요. 읽고 싶은 인문서를 내고 있는 아르테에서 신간이 나왔어요. 이름하여 <언어의 본질>!!! 제목만 들으면 좀 딱딱하고 학술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음... 실은 좀 딱딱하고 학술적인 내용은 틀림없는데, 그렇다고 딱딱하고 학술적이기만 하지는 않답니다. 이 책은 언어의 기원과 진화를 이야기합니다. 열쇠는 바로 의성의태어입니다. 평소에 외국어의 특징이나 문법, 또는 글쓰기의 문장 같은 이야기는 흔히 나누어도, 의성의태어 이야기는 잘 들어보지 못했을 겁니다. 일본어와 한국어는 의성의태어가 풍부하게 발달한 언어입니다. .......
hu, 12 Feb 2026 13:08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치열하게 피는 꽃>치열하게 피는 꽃 이치요 | 히구치 이치요 | 알라딘 ***스물세 살에 요절한 히구치 이치요는 일기를 40권 남짓이나 남겼다고 한다. 일기를 읽어보면 젊은 여성의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심정을 담담하게(!) 써 내려갔으나 문장 밑으로는 슬픔과 아픔과 절망과 아울러 의지와 결기가 격류처럼 흘러가고 있다. 외유내강의 성정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하다. 개인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압력에 굴종하지 않고 고난을 헤쳐 나가려는 모습이 눈물겹다. ‘힘없는 여성’이라는 탄식의 한마디가 어떤 구호나 외침보다 더 진하게 남는다.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차피 나는 힘없는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일들.......
hu, 12 Feb 2026 00:26
류이치 사카모토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이 책의 제목은 죽음을 앞둔 사람의 독백이기에 묘하게 절망적이면서도 아련한 감성을 넘나든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마지막’을 늘 의식하려고 한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워낙 이름 있는 아티스트인 만큼 세계적인 규모로 활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음악가이자 영화배우라는 점도 신선했는데, 과연 비상하게 유명한 뮤지션, 영화감독, 학자와 평론가 등과 인연을 맺으면서 평생을 살았구나 싶다. 그러한 인생은 타고나는 것이 아닐까. 화려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누구에게나 인생의 무게는 비슷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오늘이 늘 마지막이다. (‘파트너’라는 번역어가 몹시 거슬.......
Wed, 11 Feb 2026 20:10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어쩐지 이해하거나 수긍하기 어려운 인간의 어두운 내면이 한순간도 비움 없이 꽉 차 있는 것 같다. 한강 소설은 쉽게 읽어내기 어렵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 작품도 그러했다. 사랑하는 관계는 이미 절대성을 띠고 주어진다. 그 관계 안에 삶과 죽음이 가로지른다. 그래서 사랑하는 관계의 진실을 추적하는 일에 의혹이나 질투가 끼어들기는 해도 파고들지는 못한다. 그렇게 설정되어 있다. 그뿐이다. 그러니까, E=mc²이란 말은…… 비어 있다고 해서 그게 정말 비어 있는 게 아니고,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거지. 네가 말한 건 에너지가 곧 물질이라는 등식이니까. 수증기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온이 내려가면 물이 되고 얼.......
Sun, 08 Feb 2026 00:04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외 <발칙한 그녀들>***일본 근대 여성 작가 일곱 명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발표된 작품들을 모았다.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시기에 옛 제도와 가치관의 질곡을 섬세한 시선으로 짚어낸다. 특히 근대소설이라는 장르가 아직 확고하게 성립하지 않은 시대에 소설에 관해 탐구하고 모색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 또한 여러 제약과 모순에 얽매인 여성의 몸으로 거대한 사회 체제를 비판하고 저항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생기 넘치는 사람들과 화려하게 빛나는 전구 불빛에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아내는 몸에서 빛이랄까 생기랄까 그런 게 빠져나가는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자만심은 어느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
Sat, 07 Feb 2026 14:52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해질 무렵 무라사키>해질무렵 무라사키 | 히구치 이치요 | 알라딘 ***2026년 1월, 일본 최초의 근대 여성 작가이자 우리에게는 오천 엔 지폐의 인물로 친근한 히구치 이치요의 작품을 읽었다. 고작 14개월 만에 『섣달그믐』, 『키 재기』, 『탁류』, 『십삼야』 등을 남기고 아깝게 요절한 일본 근대문학의 최초 여성 작가로서 서민 여성의 삶을 그려냈다. 옛 정취가 흠씬 묻어나는 한편, 자극적이지 않고 소박한 정서 속에 감정의 절제가 돋보였다. 특히 여성의 처지에 대한 적절한 인식과 여성성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특징적이었다. 미도리의 눈에는 남자라는 것이 전혀 무섭지도 겁나지도 않았다. 유녀라는 것이 그다지 천한 직업이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예전.......
Fri, 06 Feb 2026 22:02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키 재기 외>****일본에서는 메이지 20년대, 즉 1880년대 후반에 나카지마 쇼엔(中島湘煙), 시미즈 시킨(清水紫琴), 다나베 가호(田辺花圃=三宅花圃), 기무라 아케보노(木村曙), 고가네이 기미코(小金井喜美子), 와카마쓰 시즈코(若松賤子),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같은 여성 작가가 다수 등장했다고 한다. 물론 히구치 이치요는 자신이 여성이라는 뚜렷한 자각 아래 사회 약자의 목소리를 세상에 내보냈다. 한마디로 여성성을 뚜렷하게 자각한 여성작가였다. 특히 「탁류(흐린 강)」은 私娼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작품이다. 여성이라는 성의 중심화를 읽어낼 수 있다. 한편, 이치요는 ‘아속절충체(雅俗折衷体)’ 즉 문어체와 구어체를 혼합한 문체를.......
Sat, 31 Jan 2026 00:38
히구치 이치요, <치열하게 피는 꽃>치열하게 피는 꽃 이치요 | 히구치 이치요 | 알라딘 ****히구치 이치요는 마흔 권이 넘는 일기를 남겼다고 한다. 심경을 직접 토로하는 일기 장르에서도 이치요는 소설작품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감정을 절제하고 꾸밈없고 잔잔하게 사실과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이 책에는 힘없는 여성이 무슨 일을 해내겠느냐는 탄식이 몇 번이나 나온다. 그러나 이치요의 행적과 소설 쓰기를 따라가볼 때 이 말이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절망과 포기는 오히려 집요한 의지의 발현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 책의 번역은 차마 언급하지 않겠다. 무사가 검을 빼 들고 전장을 향할 때의 위험은, 위험하다고 하는 눈앞에 마주할 적에 대한 위험이다. 하지만 형태도 보이.......
Fri, 30 Jan 2026 21:22
[번역가의 잡담놀이] 스즈키 유이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를 읽습니다.[번역가의 잡담놀이] 스즈키 유이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를 읽습니다. : 네이버 카페
ue, 27 Jan 2026 16:45
[일본 근대문학 : 메이지 시대의 여성 작가] 2026년 1월 히구치 이치요[일본 근대문학 : 메이지 시대의 여성 작가] 2026년 1월 히구치 이치요 : 네이버 카페 안녕하세요. 새해 1월에는 일본 최초의 근대 여성 작가 히구치 이치요의 작품을 읽습니다. 일시 : 2026년 1월 29일(목) 19:00~21:00 장소 : 신촌 엘피스 카페 참가비 ; 20,000원 문의 : kkw2537@naver.com
ue, 06 Jan 2026 13:38
이경자 <꽃신>***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다룬 이야기다. 여기에는 은연중에 뿌리내린 차별이라는 ‘낡은 생각’이 어떤 동기를 통해 불쑥 올라오는지 잘 나타나 있다. 일본인 초등학생들이 기아에 시달리는 ‘북조선’ 어린이를 도우려는 어느 절의 행사에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평소 친절하게 대해준 빵집 아주머니에게 포스터를 붙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하는 장면이 있다. 빵집 아주머니는 “다른 거라면 모르겠지만 미사일을 겨누는 나라를 도와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나서, “초등학생은 그런 일에 안 끼어드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말한다. 아주 전형적으로 잘 그려낸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억지스럽지 않게 초등학생들이.......
Wed, 03 Dec 2025 19:07
[일본 근대문학 읽기]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요. <일본 근대소설 읽기>에서는 정통 문학작품(!)을 읽느라 유명한 베스트셀러는 거의 다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0월에는 드디어 일본문학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을 읽습니다. 흥미로운 작품이니까 술술 읽을 수 있겠지요. 오붓한 자리도 좋지만 떠들썩한 자리도 좋습니다. 많이 참여해주세요. [일본 근대문학 읽기] 10월에는 저명한 <금각사>를 읽습니다 : 네이버 카페 
Mon, 10 Nov 2025 21:53
[번역가의 잡담놀이] <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를 읽습니다안녕하세요. 홀수 달에는 흥겨운 <번역가의 잡담놀이>를 진행합니다. 이번에는 야나부 아키라의 <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를 읽습니다. 이 책은 1982년에 나온 <번역어 성립 사정(飜譯語成立事情)>을 번역한 책입니다. 실은 대학원 시절 원서로 먼저 읽었고, 나중에 번역본 <일본어 성립 사정>(일빛, 2003)이 나왔습니다. 위에 소개한 책은 판본을 새로 해서 최근에 간행한 책입니다. 일찍이 일본에도 한국에도 ‘연애’는 없었습니다. ‘색(色)’이나 ‘연(恋)’과 구별되는 ‘고상한 감정’을 가리키는 Love의 번역어는 겨우 한 세기 전에 탄생했지요. 이 책은 사회, 개인, 자연, 권리, 자유, 그와 그녀 같....... 
Mon, 10 Nov 2025 21:50
동물의 왕국- 옛 메모120kg 나가는 암사자는 배가 불러도 시속 48km로 달릴 수 있다. 230kg 나아가는 수사자는 괴력을 발휘한다. 그의 무는 힘은 450kg에 달한다. 검은등재칼은 개과이고 새끼 물개를 사냥한다. 늘보곰은 가슴에 하얀 무늬가 귀엽다. 그러나 발톱이 날카롭다. 주로 과일을 먹고 고기는 거의 먹지 않는다. 스리랑카에 서식한다. 유럽의 들소 주버는 시속 40km로 달린다. 성체는 나수문과 가지를 1년에 4000kg 정도 꺾는다. 이는 생물 다양종에 기여한다. 임신 기간은 9개월이고 2~3년마다 출산한다. 신생 소는 25kg쯤 나간다. 타란툴라 거미는 개구리가 새끼를 지켜준다. 흰동가리와 말미잘은 완벽한 공생관계를 맺는다. 카멜레온은 11월 말에 지상에 나.......
hu, 30 Oct 2025 1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