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Changes Macro

특정 페이지에 대한 blog rss
  • ?action=rss_blog
  • ?action=blogrss

전체 페이지에 대한 BlogChanges

[[BlogChanges(all)]]

특정 페이지에 대한 BlogChanges
/!\ cvs
[[BlogChanges("MyPage",all)]]

Total 1230 pages



[[BlogChanges('Blog/.*',10,simple)]]



[[BlogChanges(".*Blog",10,simple)]]



[[BlogChanges('Blog/Beta',simple)]]




[[BlogChanges('Blog/Beta',10,simple)]]



[[BlogChanges('Blog/Beta',simple,10)]]


[[BlogChanges('Blog/.*',10,all,simple,summary)]]

Jul 09, 2026 #
by hyacinth July 9th, 2026
건슬링어 걸.GUNSLINGER GIRL.2003 / *** / B+ /
건슬링어 걸 -IL TEATRINO-.GUNSLINGER GIRL -IL TEATRINO-.2008 / *** / A- /

최근 종종 가지고 있는 옛날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는 개인적인 프로젝트. 얼마 전에는 **건슬링어 걸 2기(2008)**를 감상했다.

이 작품은 방영 당시 중도하차했었다. 1기의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에서 2기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졌고, 당시 기준으로도 저예산 느낌이 많이 나는 작화와 아쉬운 액션 연출 때문에 관심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과 달리 (자본의 영향이 큰) 작화보다는 연출과 제작자의 의도와 메시지에 더 신경쓰게 되었다.

2기는 원작자 아이다 유가 직접 각본에 참여한 작품으로, 1기보다 훨씬 원작에 가까운 내용이다. 당시에는 5년 만에 2기가 나온다는 소식에 상당한 기대를 모았지만, 1기의 음울하고 차가운 분위기에 꽂힌(...)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밝고 똘망똘망한 눈빛[1](...)의 의체들이 기대에 한참 못미쳤기 때문에, 워낙 분위기가 달라져서 당시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원작자가 "흥행과 상관없이 초심으로 돌아가 각본 작업을 했고, 그 결과에 만족한다."라고 말한 이유를 이제는 이해한다.

이 작품은 원작이 주장했던 분위기에 가깝게 1기와는 다른 접근으로 의체들의 비극을 이야기한 작품이다. 5공화국파의 히트맨 피노키오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1쿨 안에서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작품 전체의 완결성도 높다.

지금의 나는 1기보다 원작자가 직접 참여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확실히 담아낸 2기가 더 인상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작품을 보는 기준도 함께 달라진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게 다시보기의 묘미이다.😓
----
  • [1] 귀엽다.
Jul 04, 2026 #
by hyacinth July 4th, 2026
…보름 정도 WikipediaKo:에마뉘엘_레비나스 (1906~1995)의 윤리 철학인 ‘타자성의 윤리’에 빠져있었고 어떤 사상인지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레비나스는 홀로코스트를 겪은 사람이고 그래서 그에게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절박한 과제였다. 레비나스는 타인을 무한(그의 책에서 ‘무한’은 지겹도록 나온다)과 연결시킴으로써 살해의 ‘윤리적’ 불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타자의 무한성과 대칭을 이루는 것은 ‘동일자’인 나(자신)의 유한함이다. 전체성이란 유한이 무한을 배제하고 이룩하고자 하는 폐쇄적인 세계이다. 내가 파악하고 지배할 수 있는 세계(보충: 즉 레비나스의 “무한”은 존재론적 개념이라기보다 내가 결코 포섭할 수 없는 초월성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규정 가능한 세계가 동일성의 세계고 전체성의 세계다. 여기서는 자유가 중요하다. 자유는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영역에서 확보되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산업문명은 이와 같은 자유성과 동일성의 확장을 꾀해 왔는데, 그 부정적 귀결이 다른 사람마저 지배의 대상으로 놓은 것이다. 자기에게 익숙한 규정들을 통해 동일성 속에 포섭하려 했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아예 죽여 없애버리려는 극단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이런 사태를 극복하는 길로 레비나스가 내놓은 것이 “죽이지 말라”라는 타인의 호소에 응답하는 책임 윤리이다.

나🌳위키(20260704)에서는 여기까지를 이렇게 요약한다. “르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인식 주체 중심의 존재론은 '나'뿐만 아닌 '타자'조차도 '나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이론으로 보고 이것이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로 발전한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 사상의 원천을 서양 존재론의 전통, 존재에서 악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 존재가 악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윤리는 보통 선택의 문제이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은 것, 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는 것의 선택이다. 그 선택이 나의 이익에 따라서가 아니라 타자의 호소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 레비나스 윤리의 특징이다. 사실 이건 어려운 문제다. 선택을 하는 일이 어렵다기 보다는 레비나스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어렵다. 그만큼 독창적이다. 보통 우리는 이 문제를 레비나스처럼 접근하지 않는다. 도덕적 행위가 옳으니까 그것이 내 이익에 배치되더라도 내가 그 선택을 한다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더 이유를 캐물으면 처벌이나 비난이 두려워서 라고 말하거나, 조금 더 캐물으면 그것이 결국 전체에게 이익이 된다고 답하거나 이것을 세련되게 이론화하면 규범적 윤리(의무론)나 공리주의가 된다. 의무론(칸트)이나 목적론(공리주의-벤담, 밀)이 우리에게 더 익숙한 해설이다.
레비나스의 출발점은 다르다. 윤리적 선택(행동)은 나와 마주한 누군가가 내게 부탁을 하거나 호소하는 것이 나의 마음과 행동을 움직이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는 윤리로 작용할 수 있으려면, 이것이 일회적인 것에 그치지 않으려면 원리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호소하는 자의 위상에 의거하는 경우와 호소에 응답하는 자의 본성에 의거하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후자이다. 인간에게는 본래 타인의 호소에 응하는 심성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얼핏 사단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나, 애덤 스미스의 동정심(sympathy)이 떠오르지 않은가. 레비나스의 견지에서 볼 때 문제는 내적 본성을 따른다는 것은 결국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연민이나 동정심을 느끼는 것은 대개 우리와 같은 자, 우리와 같은 면모 아닌가.
레비나스가 택한 길은 다르다. 같은 자가 아니라 다른 자에게 주목한다. 호소에 응하는 자보다 호소하는 자에 무게가 놓인다. 레비나스가 특히 주목하는 호소하는 자는 약자이다. 물질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힘없고 헐벗은 사람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 호소는 명령이기도 하다. 물리적 강제력을 수반해서가 아니라, 높은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왜 높은가? 동일성의 틀에서 벗어나 있어서, 무한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다. 여기가 레비나스의 가장 큰 독창성인데 타자가 약자이고 무한한 자라고 보는 견지는 결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무한과 연결된 것은 보통 신으로 받아들어졌고 무한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호소하는 자였지 호소에 응답하는 자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레비나스처럼, 호소하는 자가 타자고 호소에 응답하는 자가 동일성이라는 주장은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전환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바탕에는 앞서 얘기한 동일자 세계의 확장과 강화, 또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문제와 엮여 있다.

호소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도 아니고 대칭적인 관계도 아니다. 호소하고 명령하는 자는 항상 타자이고, 호소에 응답하는 자는 언제나 동일자이다. 나는 언제나 호소에 응답하는 책임의 위치에 선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런 관계는 불균등하고 비대칭적이지만, 불공평한 것도 부정의한 것도 아니다. 애초에 대등하지 않은 양자에게 균형을 요구하는 것이 오히려 불공평일 수 있다. 타인을 또하나의 ‘나’인 동일자로 대하는 것은 진정으로 타자와 관계하는 것이 못된다. 그것은 견줌과 계산의 관계이지 호소와 응답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역시 나무위키는 이를 이렇게 요약한다.. “이는 타자에 의해 자신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말로는 '타자의 인질'이 되는 것을 말한다. 타자의 생명과 고유성은 '성전(聖殿)'이며, 우리 자신은 윤리성을 지키기 위해 그들 타자가 유린되거나 다치지 않도록 수호하는 볼모된 자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아나키의 주체를 말하면서, 타자와 나는 영감의 관계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윤리학은 존재론에 앞선다(Ethics precedes ontology)'는 이론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상실해 가던 윤리와 도덕론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고, 서구 전통에 대한 비판은 후에 포스트모더니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여기까지 레비나스 개론을 정리했다. 훈련 받은 학자들처럼 레비나스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평범한 일반인으로서 이제 적어도 앞으로 책에서 “레비나스식으로 말하면~”라는 표현이나, 들뢰즈와 레비나스의 사유를 비교 조망했을 때 어떤 배경인지는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
  • [*] 보충: 여기가 레비나스 철학의 미묘한 지점인데 약자를 자주 예로 들기는 하지만 “약자이기 때문에 호소한다”는 인과관계가 레비나스의 핵심은 아니다.. 오히려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내 앞에 있는 모든 타인’이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나에게 이렇게 나타난다. “나를 죽이지 말라.”“나에게 책임을 져라.” 이것이 ‘얼굴(face)’의 호소이다(그의 책에서 ‘얼굴‘도 지겹게 나온다). 이 호소는 상대가 실제로 힘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얼굴 자체가 윤리적 요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Apr 10, 2026 #
by hyacinth April 10th, 2026
[ISBN-9788994159140]
스티븐 내들러 (지은이), 김호경 (옮긴이)
텍스트, 2011
740쪽
ISBN 9788994159140


<스피노자>는 스티븐 내들러가 집필한 스피노자 전기서로, 스피노자의 생애와 철학을 단순한 개괄에 그치지 않고 그의 철학적 배경이 탄생하게 된 자세한 전기적·지적 배경까지 소개한 책이다. 저자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 17세기 철학을 연구해 온 학자로, 특히 이 책은 스피노자를 일반 대중에게 삶의 맥락 속에서 소개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이 책은 스피노자를 단순히 그의 철학을 읽는 관점을 넘어, 움직이고 있는 17세기의 네덜란드로 독자를 안내한다. 그 시대와 사회, 그가 자란 유대 공동체 당시 환경과 인간적 경험 속에서 어떻게 한 철학자의 논리가 탄생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암스테르담의 포르투갈계 유대 공동체, 포르투갈·에스파냐 유대인들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동하게 된 배경, 유대 공동체에서 파문당한 후 암스테르담을 떠나 이주한 보르뷔르흐, 많은 지인들이 있었던 헤이그 등 스피노자의 삶의 공간을 상세히 보여 준다. 또한 네덜란드에서 일어났던 전쟁과 협상, 재해와 경제적 성장, 정치적 동요와 패권을 잡기 위한 종교적 열망까지 다루며, 중세와 근대가 나뉘던 부산한 시기 속에서 ‘최초의 근대인’ 스피노자의 모습을 조명한다.

저자인 내들러가 누차 강조했듯이, 이 책은 전문적으로 스피노자의 사상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스피노자의 삶을 소개하는 책이다. 그래서 새로운 형태의 진리를 찾기 위해서 치열했던 스피노자의 눈빛과 그의 검소한 방과 렌즈 세공을 하며 유리 먼지가 날리던 그의 작업실의 풍경을 마치 실제로 보고 온 듯 하다. 책을 읽고 나니 당대에도 온화하고 조용한 카리스마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스피노자를 나도 한 번 만나 보고 싶어졌다.

스피노자 철학을 이해하는 것에 출발점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 추천.

도서출판 텍스트-기본 정보

▮지은이
스티븐 내들러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 17세기 철학자와 그들의 철학을 연구해 오고 있다. 현재 매디슨에 있는 위스콘신 대학의 철학과 교수이자 유대학 연구소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 《Spinoza: A Life》, 《Rembrandt’s Jews》, 《Spinoza’s Heresy: Immortality and the Jewish Mind》,《Spinoza’s ‘Ethics’: An Introduction》, 《The Best of All Possible Worlds: A Story of Philosophers, God, and Evil》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스피노자Spinoza: A Life》는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첫 책이다.

▮추천사
스피노자의 가장 완전한 전기
《스피노자 - 철학을 도발한 철학자》는 지금까지 출판된 스피노자 전기들 중에서 가장 완전한 전기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스피노자 철학과 연관된 다양한 요소들의 기록을 가능한 한 모두 참고하면서 방대한, 그러면서도 흥미로운 스피노자 전기를 구성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유대 민족 배경, 스피노자 철학의 사회, 정치적 배경이 이 책에서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또한 암스테르담의 포르투갈계 유대 공동체를 뛰쳐나와 자유로운 네덜란드 사회의 문화를 호흡하는 스피노자의 지적 발전과 아울러 스피노자가 어떻게 당시의 급진주의 사상가들 중 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 역시 이 책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추천사> 중에서
강영계 건국대 철학과 명예 교수
Mar 21, 2026 #
by hyacinth March 21st, 2026
"There's a difference between knowing the path, and walking the path"
— Morpheus, The Matrix.

20260313_152224.jpg
[JPG image (2.05 MB)]
20260313_152248.jpg
[JPG image (1.89 MB)]
20260313_151429.jpg
[JPG image (1.53 MB)]
20260313_151619.jpg
[JPG image (1.68 MB)]

광교에서 이미 몇 년을 살았다. 그런데 집 근처에 잘 정비된 쾌적한 산책로가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여름가을에 오면 더 좋을 것 같다.
지도에서는 ​​그냥 작은 녹지대일 뿐이라 이렇게 잘 닦인 길이 있는 줄은 몰랐다.

영화 <The Matrix>에서 모피어스가 한 유명한 대사가 있다.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은 다르다."
바로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
같은 맥락에서 폴란드계 미국 철학자이자 언어학자이자 일반 의미론(General Semantics)의 창시자인 알프레드 코지브스키(Alfred Habdank Skarbek Korzybski, 1879–1950)의 잘 알려진 말도 있다.

"The map is not the territory."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의미는 다음과 같다: 지도(모델, 설명, 이론)는 현실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현실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화된 표현을 보고 있을 뿐이다.

지도 = 설명, 이론, 데이터, 모델
영토 = 실제 세계, 실제 경험

그래서 흔히 다음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설명으로 듣는 것 ≠ 직접 해보는 것
데이터 ≠ 현실 자체

이 말을 이해하는 것조차... 나도 실제 '영토'를 경험하면서 진짜 이해되는 것은, 이것이 메타리얼리즘Wikipedia:Metarealism ? 😅
Dec 03, 2025 #
by hyacinth December 3rd, 2025
일상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까 이런 포맷도 괜찮은 것 같다. 맛집 사진들은 항상 찍기 때문에 종종 이렇게 올려야겠다. ;)

24년 12월 3일(화)

평온한 하루였다(낮까지는 말이지).
img
img
img
img


24년 12월 6일(금)

안국동에 있는 브런치 카페에서 아점을 먹고 원데이 클래스에서 도자기를 만들고, 혜화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저녁을 먹었다.
img
img
img
img
img
img
img
img
img
img
img
img
img
img
img

24년 12월 7일(토)

물대포라도 쏘면 가능하면 노약자보다 가장 앞서 맞으려고 나왔는데 너무 많은 사람이 모여서 그럴 필요가 없었음.
img
img
img
img
img
img
img
img
img
img
img
img
img

24년 12월 9일(월)

img

24년 12월 11일(수)

img

24년 12월 17일(화)

점심
img
img
img
img
img

24년 12월 21일(토)

img
img
img
img

24년 12월 22일(일)

img

24년 12월 24일(화)

img

24년 12월 30일(월)

img
img
img

<끝.>

Aug 18, 2025 #
by hyacinth August 18th, 2025

어제 베스트오브파나마 원두 옥션랏을 경험했다. 작년에도 옥션 가격이 폭등했는데 올해는 그보다 가격이 더 뛰어 최고 랏이 3만 달러를 넘기기도 했다(1kg 가격이다). 뛰어난 랏들은 원두 원가 kg당 2-3백만원을 거뜬히 넘긴다. 어제 마신 커피는 8g 한잔에 3만원이었다. 분명히 품질 좋은 커피의 특징을 잘 보여주었지만 이 가격에 먹는건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매 결과만 봐도 이런 가격은 일상적으로 접하기 힘든 가격들임이 분명하다.


혹자는 "도대체 누가. 어떤 이유에서 저리 높은 금액을 지불하고 또 찾는 것일까. 커피인데. 단순히 커피 한 잔인데. 직접 마시려고? 판매하려고? 최고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기회조차 돈 주고도 못 구하는 시대"...가 되었다면서 아쉬워 한다.

파나마에서 생산되는 최고급 커피 재배량은 분명 한정적이고, 그럼에도 농장들은 옥션에서 뛰어난 평가를 받으면 얻게 되는 엄청난 부가가치를 잘 알고 있기에 체리들을 가지치기 하고 양을 줄이고 더욱 고급 커피를 생산하려고 한다. 이런 퀄리티를 인정하지 않고 수요가 없다면 아무도 최고 품질의 커피를 생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파나마 커피는 너무 비싸다 vs. 비싸지만 이해는 간다는 복합적인 생각이 든다.

그래도 옛날에는 이런 가격이 아니었는데 (불평.. 불만..) 😅

Jul 29, 2025 #
by hyacinth July 29th, 2025
위키 페이지에 사진을 올리는 건 손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페이지를 하나 만들고, 사진을 어딘가에 올리고, 이미지 주소를 하나하나 옮겨 적고.

그래서 사진을 더 간단히 등록하고 갤러리 위젯 같은 느낌으로 사진/앨범만 보여줄 수 있는 서비스를 찾다가 Single-file PHP app Files Gallery https://www.files.gallery/ 라는 솔루션을 찾았다. Files는 서버의 어느 폴더에나 삽입할 수 있는 단일 파일 PHP 앱으로, 서버의 어느 폴더에만 사진을 올리면 파일과 폴더의 갤러리를 즉시 생성한다. 즉, 말도 안되게 편하다. 2일 정도 작업해서 위키에 완벽히 통합시키는데 성공했다.
May 24, 2025 #
by hyacinth May 24th, 2025
대부분의 일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 나쁜 일 속에서도 어떤 배움을 얻거나,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를 경험하거나, 자신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힘든 일을 겪을 때는 그 속에서 좋은 점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마음에 품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덜 날카롭게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일이 자신을 어떻게 성장시켰는 지를 돌아볼 수 있는 여지를 만들게 된다. 이는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삶을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통찰의 시작일 수 있다.

나쁜 일 속에서도 좋은 점을 찾을 수 있다는 건 동서양 모두에서 비슷한 의미를 담은 표현을 찾을 수 있다.

동양의 사례: 새옹지마(塞翁之馬)
  • 한 노인이 기르던 말이 도망치자 이웃이 불행이라 했는데, 오히려 더 좋은 말을 데리고 돌아왔고, 이후 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 다쳤지만, 전쟁에 나가지 않아 목숨을 건지는 일이 벌어진다. 인생의 복과 화는 서로 엇갈리며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의 나쁜 일도 나중에 보면 좋은 일일 수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서양의 사례: 스토아 철학의 “Amor Fati”
  •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로,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좋고 나쁜 것들 모두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으라는 가르침
어제 본 영화(…)의 사례: 이번 달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윌리엄 던로의 예
  • 윌리엄 던로는 과거 CIA 보안 담당자였으나 IMF의 NOC 명단을 유출당하자 알래스카 세인트 매튜 섬의 레이더 기지로 좌천되었다. 에단(탐 크루즈 역)이 1편에서의 일 때문에 좌천당한 것에 사과하려고 하는데, 던로는 자신은 오히려 결과적으로 에단의 그런 선택과 행위 덕에 사랑하는 사람인 현재의 아내와 만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원래 있던 곳에 계속 있었으면 그렇게 죽은 듯이 평생 살았을 테니, 에단은 자신에게 새 삶을 준 셈이라며 오히려 고마워한다.

인생의 복과 화는 서로 엇갈리며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의 나쁜 일도 나중에 보면 좋은 일일 수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나는 몇 주전 나쁜 일 속에서도 좋은 점을 찾을 수 있는 걸 새삼 깨달았다. "새옹지마"와 "Amor Fati"는 지식으로서는 알고는 있었으나 역시 삶 속에서 직접 겪거나 마음으로 느꼈을 때는 그 무게와 깊이가 전혀 다르다는 걸 알았다. *아, 그래서 그런 말이 전해져 왔던 거구나*

고통과 행운, 후회와 감사가 얽힌 삶. 그 모든 것을 껴안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우리는 비로소 삶의 본질과 가까워지는 것일까?

니체는 Amor Fati를 이렇게 해석하고 말한다.

"Amor fati: 나의 공식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도, 앞으로 일어날 어떤 것도 다르게 원하지 않으리.
나는 필요성의 일부로서 그것을 사랑하리라."
– 《우상의 황혼》(Götzen-Dämmerung), 1889

한마디로 해석하면 “나는 그것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랄 정도로, 운명의 모든 것을 긍정하겠다”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고통, 비극, 불완전함까지도 기꺼이 사랑하는 강한 의지. 즉, 삶에 대한 모든 긍정(Yes)이다.
이는 니체의 또 다른 사상인 영원회귀(Die ewige Wiederkehr)와도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영원회귀의 본질적인 질문은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고통까지도 긍정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 니체의 궁극적인 도전이다. Amor Fati는 이 질문에 그렇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자신의 근본 사유라고 인정한 영원회귀 사상의 마지막 *결론*이 Amor Fati이다.

삶 전체에 대한 긍정, 고통조차도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사랑은 이것은 무기력한 체념이 아니라, 오히려 삶에 대한 가장 강력한 예찬이었다.

나쁜 일 속에서도 좋은 점을 찾을 수 있을까? 에서 시작하여
보름 정도 머리 속을 맴돌았던 생각이다.
<끝.>
Jan 18, 2025 #
by hyacinth January 18th, 2025
요즘 뉴스에 자주 나오는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잘못된 믿음으로 강한 망상과 확신에 사로잡혀 엄청난 짓을 벌이는 사람과 그 집단들을 보면서 그들이 현실로 돌아오도록 돕기 위해서는 신뢰 관계 형성, 사회적 접근, 심리 상담, 의료적 접근 방법 등이 있겠지만 나는 요즘 수백 년 전 근대 철학에서 깊이 탐구하기 시작했던 *이성*, *자유의지*, *주체성* 철학적 접근을 떠올린다. 특히 확신과 신념이란 주제를 다룰 때, 인간의 사고 체계, 진리 탐구, 그리고 극단적 믿음의 위험성을 다루는 철학자들이 많았다. 나는 요즘 인류 사회가 정보 사회를 겪으며 스파이럴하게 조금씩 안 좋은 방향으로 퇴보하고 있다는 걸 느끼는데 수백 년 전 *계몽운동*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데서 어떤 실망감을 느낀다.

칸트는 1784년에 쓴 논문 <계몽이란 무엇인가?(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에서 계몽운동의 모토는 "자기 자신의 오성(悟性)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는 것"이라고 썼다. 여기서 '오성'이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해하는 능력'을 뜻한다. 이 모토를 쉽게 말하면(넓은 의미에서 보면) '스스로 생각하는 용기를 가지라'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다.

칸트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용기를 가지라고 독려했다. 스스로 생각한다? 그거 쉽지 않나요? 거기에 용기라는 말까지 사용할 필요가 있나요? 라고 생각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이 정말로 쉬운 일일까?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칸트가 태어나기 약 백 년 전에 세상을 떠난 프랜시스 베이컨의 우상론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베이컨은 학문과 기술에 큰 혁신을 이루고 싶어 했고 그러한 혁신의 출발점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idola) 즉, 선입견과 편견을 씻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입견이 있으면 어떤 것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WikipediaKo:노붐_오르가눔 (1620)> 등에서 우상을 비판했다.

베이컨이 말한 네 가지 우상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면 첫째는 '종족의 우상'으로, 인간 정신의 습성 같은 것이다. 어떤 일을 미리 단정 짓고 단순화하거나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자기 생각에 이끌려 많은 것을 놓친다.
둘째는 '동굴의 우상'이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성향으로 사람이 무엇에 관심을 갖고 무엇을 선호하는지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며 이러한 성향에 따라 우리의 시야가 좁아진다는 것이다.
셋째는 '시장의 우상'인데 사람들이 나누는 말이 정확히 정의되지 않아서 발생한다. 베이컨은 이것이 가장 성가신 우상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비추어 보면 부적절한 언어 사용이 우리 사고에 미치는 폐해가 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넷째는 '극장의 우상'이다. 때로는 '학설의 우상'이라고도 부르는데 극장에서 상연되는 연극에 아름다운 결말이 있는 것처럼 철학적인 토론을 할 때도 요령껏 마무리하면 사람들을 속이는 토론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는 쉬울까?

베이컨이 지적하듯 우상은 우리의 지성에 영향을 주며 또 지배한다. 이를 없애지 않으면 새로운 배움을 시작할 수 없다. 우리가 새로운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할 때 자신의 우상을 이해하고 미리 바로잡을 수 있을까? 세상에 알려진 것에 기대지 않고 깊이 있게 생각하는 것은 가능할까? 즉, 선입견 없이 생각할 수 있는 걸까? 할 수 없다. 아무것도 없으면 '스스로' 생각하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다.

이제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알았다. 그렇다면 스스로 생각하는 것에 왜 '용기'가 필요할까? 선입견을 따르지 않고 굳이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일까? 그 정도라면 '용기'라는 단어까지 쓸 필요가 없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먼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려는 세력을 우리 주위에서 찾아보자. 다른 이들을 자기 생각대로 조정하려는 사람들을 떠올려보자.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권력이나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압력을 가한다. 이들을 물리치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배운 모든 선입견을 없앴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스스로 만든 습관과 지금까지 받아온 모든 교육까지도 의심할 것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안정된 일상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었던가? 진짜와 가짜,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애매한 단어들까지도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기에 우리의 일상을 성립시켜 주는 것이다. 이것에 벗어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의 표현으로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한겨울 추위 속에서 따뜻한 코트와 옷가지를 모두 빼앗기고 혼자서 방황하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에 순응하고 편안한 일상을 즐기는 대신 '스스로 생각하기'로 마음 먹는 것은 자신의 일상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일단 손에서 놓아야 한다. 이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는 사실 허위 일지도 모른다', '선악조차도 날조된 것일 지도 모른다.' 이런 것과 마주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여기까지만 하자. 결론은 비판적 사고(실수를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관점을 바꿔 생각하고, 다양한 사람, 다른 세대와,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지식을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과거의 경험에 매몰되지 않고)를 통해 망상적 신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3] [4]

오랜 생각이다.

(끝)
----
  • [3] 보충1. 우리가 경험으로 얻는 현실은 늘 억견(doxa, 그리스어: δοξα, 일반적으로는 근거가 박약한 지식을 말한다)과 쉽게 왜곡될 수 있는 여러 제약 속에서 비롯한다. 이에 대한 회의(skepticism)는 실체적 사실을 추구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덕목이다.
  • [4] 보충2. 객관적인 눈으로 관찰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우리는 누구든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건 잘 모른다.
Dec 29, 2024 #
by hyacinth December 29th, 2024

1. <그 여름에서 기다릴게(あの夏で待ってる)>(2012). 2012년 작품인데 작화가 지금 봐도 전혀 부족하지 않고 미려했다. 나가이 타츠유키 감독이 완벽주의 스타일이라서 원화가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리테이크(고쳐 그리란 의미)를 자주 한다고. 리더의 중요성을 또 확인한다.

2. 오프닝/엔딩 곡에서 I've 사운드 느낌이 났는데 스탭롤에서 편곡 작사 작곡 모두 I've 관련 사람들이 맞았다. 여기서 10년 전 추억 속으로 잠시 여행하다(...).

3. 애니메이션은 역시 계절에 맞게 봐야. 작품 배경인 여름에 봤으면 더 즐겁게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다음 볼 건 겨울 배경인 애니를 찾아 보기로 했다(...).

4. 평범한 소년의 우연한 만남, UFO를 타는 히로인, 연애 이야기 정도의 공통점이 있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イリヤの空、UFOの夏)>(2005)

오히려 이 작품에 대해서, 종종 생각했던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싶다.

이 작품은 짧다면 짧은 OVA 6화에 너무 이야기를 몰아넣어 좋은 작품이 되지 못했다는 평이 있다.

하지만 세간의 그런 평가는 뒤로 제쳐두고 10여년 전 본 이 애니메이션이 아직도 깊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이 작품에선 평생 잊지 못할 명장면이 있다[5].

애니메이션의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애니메이션의 본질이 무엇인가? 여러 예술 장르와 요소를 결합한 복합적인 매체이다. 종합 예술이라는 특성상, 강렬한 명장면 하나로도 깊은 인상을 남기며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이 바로 그런 작품이었다.

스토리텔링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지만, 서사를 넘어 *시각적 아름다움*, *음악의 감동*, *연출*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명장면 하나가 강렬한 기억을 남길 수 있다면, 감동과 기억을 남긴다면 그 순간이 작품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에 높은 평가를 남겼다.


평점:

그 여름에서 기다릴게.あの夏で待ってる.2012 / **1/2 / B+ /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イリヤの空、UFOの夏.2005 / *** / A0 /

----
  • [5] 3화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포크댄스 장면.


Jul 09, 2026 #
by hyacinth July 9th, 2026
건슬링어 걸.GUNSLINGER GIRL.2003 / *** / B+ /
건슬링어 걸 -IL TEATRINO-.GUNSLINGER GIRL -IL TEATRINO-.2008 / *** / A- /

최근 종종 가지고 있는 옛날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는 개인적인 프로젝트. 얼마 전에는 **건슬링어 걸 2기(2008)**를 감상했다.

이 작품은 방영 당시 중도하차했었다. 1기의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에서 2기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졌고, 당시 기준으로도 저예산 느낌이 많이 나는 작화와 아쉬운 액션 연출 때문에 관심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과 달리 (자본의 영향이 큰) 작화보다는 연출과 제작자의 의도와 메시지에 더 신경쓰게 되었다.

2기는 원작자 아이다 유가 직접 각본에 참여한 작품으로, 1기보다 훨씬 원작에 가까운 내용이다. 당시에는 5년 만에 2기가 나온다는 소식에 상당한 기대를 모았지만, 1기의 음울하고 차가운 분위기에 꽂힌(...)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밝고 똘망똘망한 눈빛[6](...)의 의체들이 기대에 한참 못미쳤기 때문에, 워낙 분위기가 달라져서 당시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원작자가 "흥행과 상관없이 초심으로 돌아가 각본 작업을 했고, 그 결과에 만족한다."라고 말한 이유를 이제는 이해한다.

이 작품은 원작이 주장했던 분위기에 가깝게 1기와는 다른 접근으로 의체들의 비극을 이야기한 작품이다. 5공화국파의 히트맨 피노키오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1쿨 안에서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작품 전체의 완결성도 높다.

지금의 나는 1기보다 원작자가 직접 참여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확실히 담아낸 2기가 더 인상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작품을 보는 기준도 함께 달라진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게 다시보기의 묘미이다.😓
----
  • [6] 귀엽다.
Jul 04, 2026 #
by hyacinth July 4th, 2026
…보름 정도 WikipediaKo:에마뉘엘_레비나스 (1906~1995)의 윤리 철학인 ‘타자성의 윤리’에 빠져있었고 어떤 사상인지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레비나스는 홀로코스트를 겪은 사람이고 그래서 그에게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절박한 과제였다. 레비나스는 타인을 무한(그의 책에서 ‘무한’은 지겹도록 나온다)과 연결시킴으로써 살해의 ‘윤리적’ 불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타자의 무한성과 대칭을 이루는 것은 ‘동일자’인 나(자신)의 유한함이다. 전체성이란 유한이 무한을 배제하고 이룩하고자 하는 폐쇄적인 세계이다. 내가 파악하고 지배할 수 있는 세계(보충: 즉 레비나스의 “무한”은 존재론적 개념이라기보다 내가 결코 포섭할 수 없는 초월성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규정 가능한 세계가 동일성의 세계고 전체성의 세계다. 여기서는 자유가 중요하다. 자유는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영역에서 확보되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산업문명은 이와 같은 자유성과 동일성의 확장을 꾀해 왔는데, 그 부정적 귀결이 다른 사람마저 지배의 대상으로 놓은 것이다. 자기에게 익숙한 규정들을 통해 동일성 속에 포섭하려 했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아예 죽여 없애버리려는 극단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이런 사태를 극복하는 길로 레비나스가 내놓은 것이 “죽이지 말라”라는 타인의 호소에 응답하는 책임 윤리이다.

나🌳위키(20260704)에서는 여기까지를 이렇게 요약한다. “르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인식 주체 중심의 존재론은 '나'뿐만 아닌 '타자'조차도 '나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이론으로 보고 이것이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로 발전한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 사상의 원천을 서양 존재론의 전통, 존재에서 악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 존재가 악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윤리는 보통 선택의 문제이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은 것, 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는 것의 선택이다. 그 선택이 나의 이익에 따라서가 아니라 타자의 호소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 레비나스 윤리의 특징이다. 사실 이건 어려운 문제다. 선택을 하는 일이 어렵다기 보다는 레비나스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어렵다. 그만큼 독창적이다. 보통 우리는 이 문제를 레비나스처럼 접근하지 않는다. 도덕적 행위가 옳으니까 그것이 내 이익에 배치되더라도 내가 그 선택을 한다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더 이유를 캐물으면 처벌이나 비난이 두려워서 라고 말하거나, 조금 더 캐물으면 그것이 결국 전체에게 이익이 된다고 답하거나 이것을 세련되게 이론화하면 규범적 윤리(의무론)나 공리주의가 된다. 의무론(칸트)이나 목적론(공리주의-벤담, 밀)이 우리에게 더 익숙한 해설이다.
레비나스의 출발점은 다르다. 윤리적 선택(행동)은 나와 마주한 누군가가 내게 부탁을 하거나 호소하는 것이 나의 마음과 행동을 움직이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는 윤리로 작용할 수 있으려면, 이것이 일회적인 것에 그치지 않으려면 원리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호소하는 자의 위상에 의거하는 경우와 호소에 응답하는 자의 본성에 의거하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후자이다. 인간에게는 본래 타인의 호소에 응하는 심성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얼핏 사단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나, 애덤 스미스의 동정심(sympathy)이 떠오르지 않은가. 레비나스의 견지에서 볼 때 문제는 내적 본성을 따른다는 것은 결국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연민이나 동정심을 느끼는 것은 대개 우리와 같은 자, 우리와 같은 면모 아닌가.
레비나스가 택한 길은 다르다. 같은 자가 아니라 다른 자에게 주목한다. 호소에 응하는 자보다 호소하는 자에 무게가 놓인다. 레비나스가 특히 주목하는 호소하는 자는 약자이다. 물질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힘없고 헐벗은 사람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 호소는 명령이기도 하다. 물리적 강제력을 수반해서가 아니라, 높은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왜 높은가? 동일성의 틀에서 벗어나 있어서, 무한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다. 여기가 레비나스의 가장 큰 독창성인데 타자가 약자이고 무한한 자라고 보는 견지는 결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무한과 연결된 것은 보통 신으로 받아들어졌고 무한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호소하는 자였지 호소에 응답하는 자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레비나스처럼, 호소하는 자가 타자고 호소에 응답하는 자가 동일성이라는 주장은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전환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바탕에는 앞서 얘기한 동일자 세계의 확장과 강화, 또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문제와 엮여 있다.

호소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도 아니고 대칭적인 관계도 아니다. 호소하고 명령하는 자는 항상 타자이고, 호소에 응답하는 자는 언제나 동일자이다. 나는 언제나 호소에 응답하는 책임의 위치에 선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런 관계는 불균등하고 비대칭적이지만, 불공평한 것도 부정의한 것도 아니다. 애초에 대등하지 않은 양자에게 균형을 요구하는 것이 오히려 불공평일 수 있다. 타인을 또하나의 ‘나’인 동일자로 대하는 것은 진정으로 타자와 관계하는 것이 못된다. 그것은 견줌과 계산의 관계이지 호소와 응답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역시 나무위키는 이를 이렇게 요약한다.. “이는 타자에 의해 자신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말로는 '타자의 인질'이 되는 것을 말한다. 타자의 생명과 고유성은 '성전(聖殿)'이며, 우리 자신은 윤리성을 지키기 위해 그들 타자가 유린되거나 다치지 않도록 수호하는 볼모된 자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아나키의 주체를 말하면서, 타자와 나는 영감의 관계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윤리학은 존재론에 앞선다(Ethics precedes ontology)'는 이론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상실해 가던 윤리와 도덕론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고, 서구 전통에 대한 비판은 후에 포스트모더니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여기까지 레비나스 개론을 정리했다. 훈련 받은 학자들처럼 레비나스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평범한 일반인으로서 이제 적어도 앞으로 책에서 “레비나스식으로 말하면~”라는 표현이나, 들뢰즈와 레비나스의 사유를 비교 조망했을 때 어떤 배경인지는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Apr 10, 2026 #
by hyacinth April 10th, 2026
[ISBN-9788994159140]
스티븐 내들러 (지은이), 김호경 (옮긴이)
텍스트, 2011
740쪽
ISBN 9788994159140


<스피노자>는 스티븐 내들러가 집필한 스피노자 전기서로, 스피노자의 생애와 철학을 단순한 개괄에 그치지 않고 그의 철학적 배경이 탄생하게 된 자세한 전기적·지적 배경까지 소개한 책이다. 저자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 17세기 철학을 연구해 온 학자로, 특히 이 책은 스피노자를 일반 대중에게 삶의 맥락 속에서 소개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이 책은 스피노자를 단순히 그의 철학을 읽는 관점을 넘어, 움직이고 있는 17세기의 네덜란드로 독자를 안내한다. 그 시대와 사회, 그가 자란 유대 공동체 당시 환경과 인간적 경험 속에서 어떻게 한 철학자의 논리가 탄생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암스테르담의 포르투갈계 유대 공동체, 포르투갈·에스파냐 유대인들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동하게 된 배경, 유대 공동체에서 파문당한 후 암스테르담을 떠나 이주한 보르뷔르흐, 많은 지인들이 있었던 헤이그 등 스피노자의 삶의 공간을 상세히 보여 준다. 또한 네덜란드에서 일어났던 전쟁과 협상, 재해와 경제적 성장, 정치적 동요와 패권을 잡기 위한 종교적 열망까지 다루며, 중세와 근대가 나뉘던 부산한 시기 속에서 ‘최초의 근대인’ 스피노자의 모습을 조명한다.

저자인 내들러가 누차 강조했듯이, 이 책은 전문적으로 스피노자의 사상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스피노자의 삶을 소개하는 책이다. 그래서 새로운 형태의 진리를 찾기 위해서 치열했던 스피노자의 눈빛과 그의 검소한 방과 렌즈 세공을 하며 유리 먼지가 날리던 그의 작업실의 풍경을 마치 실제로 보고 온 듯 하다. 책을 읽고 나니 당대에도 온화하고 조용한 카리스마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스피노자를 나도 한 번 만나 보고 싶어졌다.

스피노자 철학을 이해하는 것에 출발점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 추천.

도서출판 텍스트-기본 정보

▮지은이
스티븐 내들러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 17세기 철학자와 그들의 철학을 연구해 오고 있다. 현재 매디슨에 있는 위스콘신 대학의 철학과 교수이자 유대학 연구소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 《Spinoza: A Life》, 《Rembrandt’s Jews》, 《Spinoza’s Heresy: Immortality and the Jewish Mind》,《Spinoza’s ‘Ethics’: An Introduction》, 《The Best of All Possible Worlds: A Story of Philosophers, God, and Evil》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스피노자Spinoza: A Life》는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첫 책이다.

▮추천사
스피노자의 가장 완전한 전기
《스피노자 - 철학을 도발한 철학자》는 지금까지 출판된 스피노자 전기들 중에서 가장 완전한 전기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스피노자 철학과 연관된 다양한 요소들의 기록을 가능한 한 모두 참고하면서 방대한, 그러면서도 흥미로운 스피노자 전기를 구성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유대 민족 배경, 스피노자 철학의 사회, 정치적 배경이 이 책에서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또한 암스테르담의 포르투갈계 유대 공동체를 뛰쳐나와 자유로운 네덜란드 사회의 문화를 호흡하는 스피노자의 지적 발전과 아울러 스피노자가 어떻게 당시의 급진주의 사상가들 중 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 역시 이 책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추천사> 중에서
강영계 건국대 철학과 명예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