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2026-07

Submitted by hyacinth @
건슬링어 걸.GUNSLINGER GIRL.2003 / *** / B+ /
건슬링어 걸 -IL TEATRINO-.GUNSLINGER GIRL -IL TEATRINO-.2008 / *** / A- /

최근 종종 가지고 있는 옛날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는 개인적인 프로젝트. 얼마 전에는 **건슬링어 걸 2기(2008)**를 감상했다.

이 작품은 방영 당시 중도하차했었다. 1기의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에서 2기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졌고, 당시 기준으로도 저예산 느낌이 많이 나는 작화와 아쉬운 액션 연출 때문에 관심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과 달리 (자본의 영향이 큰) 작화보다는 연출과 제작자의 의도와 메시지에 더 신경쓰게 되었다.

2기는 원작자 아이다 유가 직접 각본에 참여한 작품으로, 1기보다 훨씬 원작에 가까운 내용이다. 당시에는 5년 만에 2기가 나온다는 소식에 상당한 기대를 모았지만, 1기의 음울하고 차가운 분위기에 꽂힌(...)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밝고 똘망똘망한 눈빛[1](...)의 의체들이 기대에 한참 못미쳤기 때문에, 워낙 분위기가 달라져서 당시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원작자가 "흥행과 상관없이 초심으로 돌아가 각본 작업을 했고, 그 결과에 만족한다."라고 말한 이유를 이제는 이해한다.

이 작품은 원작이 주장했던 분위기에 가깝게 1기와는 다른 접근으로 의체들의 비극을 이야기한 작품이다. 5공화국파의 히트맨 피노키오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1쿨 안에서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작품 전체의 완결성도 높다.

지금의 나는 1기보다 원작자가 직접 참여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확실히 담아낸 2기가 더 인상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작품을 보는 기준도 함께 달라진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게 다시보기의 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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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귀엽다.



Submitted by hyacinth @
…보름 정도 WikipediaKo:에마뉘엘_레비나스 (1906~1995)의 윤리 철학인 ‘타자성의 윤리’에 빠져있었고 어떤 사상인지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레비나스는 홀로코스트를 겪은 사람이고 그래서 그에게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절박한 과제였다. 레비나스는 타인을 무한(그의 책에서 ‘무한’은 지겹도록 나온다)과 연결시킴으로써 살해의 ‘윤리적’ 불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타자의 무한성과 대칭을 이루는 것은 ‘동일자’인 나(자신)의 유한함이다. 전체성이란 유한이 무한을 배제하고 이룩하고자 하는 폐쇄적인 세계이다. 내가 파악하고 지배할 수 있는 세계(보충: 즉 레비나스의 “무한”은 존재론적 개념이라기보다 내가 결코 포섭할 수 없는 초월성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규정 가능한 세계가 동일성의 세계고 전체성의 세계다. 여기서는 자유가 중요하다. 자유는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영역에서 확보되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산업문명은 이와 같은 자유성과 동일성의 확장을 꾀해 왔는데, 그 부정적 귀결이 다른 사람마저 지배의 대상으로 놓은 것이다. 자기에게 익숙한 규정들을 통해 동일성 속에 포섭하려 했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아예 죽여 없애버리려는 극단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이런 사태를 극복하는 길로 레비나스가 내놓은 것이 “죽이지 말라”라는 타인의 호소에 응답하는 책임 윤리이다.

나🌳위키(20260704)에서는 여기까지를 이렇게 요약한다. “르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인식 주체 중심의 존재론은 '나'뿐만 아닌 '타자'조차도 '나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이론으로 보고 이것이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로 발전한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 사상의 원천을 서양 존재론의 전통, 존재에서 악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 존재가 악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윤리는 보통 선택의 문제이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은 것, 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는 것의 선택이다. 그 선택이 나의 이익에 따라서가 아니라 타자의 호소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 레비나스 윤리의 특징이다. 사실 이건 어려운 문제다. 선택을 하는 일이 어렵다기 보다는 레비나스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어렵다. 그만큼 독창적이다. 보통 우리는 이 문제를 레비나스처럼 접근하지 않는다. 도덕적 행위가 옳으니까 그것이 내 이익에 배치되더라도 내가 그 선택을 한다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더 이유를 캐물으면 처벌이나 비난이 두려워서 라고 말하거나, 조금 더 캐물으면 그것이 결국 전체에게 이익이 된다고 답하거나 이것을 세련되게 이론화하면 규범적 윤리(의무론)나 공리주의가 된다. 의무론(칸트)이나 목적론(공리주의-벤담, 밀)이 우리에게 더 익숙한 해설이다.
레비나스의 출발점은 다르다. 윤리적 선택(행동)은 나와 마주한 누군가가 내게 부탁을 하거나 호소하는 것이 나의 마음과 행동을 움직이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는 윤리로 작용할 수 있으려면, 이것이 일회적인 것에 그치지 않으려면 원리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호소하는 자의 위상에 의거하는 경우와 호소에 응답하는 자의 본성에 의거하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후자이다. 인간에게는 본래 타인의 호소에 응하는 심성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얼핏 사단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나, 애덤 스미스의 동정심(sympathy)이 떠오르지 않은가. 레비나스의 견지에서 볼 때 문제는 내적 본성을 따른다는 것은 결국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연민이나 동정심을 느끼는 것은 대개 우리와 같은 자, 우리와 같은 면모 아닌가.
레비나스가 택한 길은 다르다. 같은 자가 아니라 다른 자에게 주목한다. 호소에 응하는 자보다 호소하는 자에 무게가 놓인다. 레비나스가 특히 주목하는 호소하는 자는 약자이다. 물질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힘없고 헐벗은 사람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 호소는 명령이기도 하다. 물리적 강제력을 수반해서가 아니라, 높은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왜 높은가? 동일성의 틀에서 벗어나 있어서, 무한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다. 여기가 레비나스의 가장 큰 독창성인데 타자가 약자이고 무한한 자라고 보는 견지는 결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무한과 연결된 것은 보통 신으로 받아들어졌고 무한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호소하는 자였지 호소에 응답하는 자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레비나스처럼, 호소하는 자가 타자고 호소에 응답하는 자가 동일성이라는 주장은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전환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바탕에는 앞서 얘기한 동일자 세계의 확장과 강화, 또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문제와 엮여 있다.

호소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도 아니고 대칭적인 관계도 아니다. 호소하고 명령하는 자는 항상 타자이고, 호소에 응답하는 자는 언제나 동일자이다. 나는 언제나 호소에 응답하는 책임의 위치에 선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런 관계는 불균등하고 비대칭적이지만, 불공평한 것도 부정의한 것도 아니다. 애초에 대등하지 않은 양자에게 균형을 요구하는 것이 오히려 불공평일 수 있다. 타인을 또하나의 ‘나’인 동일자로 대하는 것은 진정으로 타자와 관계하는 것이 못된다. 그것은 견줌과 계산의 관계이지 호소와 응답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역시 나무위키는 이를 이렇게 요약한다.. “이는 타자에 의해 자신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말로는 '타자의 인질'이 되는 것을 말한다. 타자의 생명과 고유성은 '성전(聖殿)'이며, 우리 자신은 윤리성을 지키기 위해 그들 타자가 유린되거나 다치지 않도록 수호하는 볼모된 자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아나키의 주체를 말하면서, 타자와 나는 영감의 관계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윤리학은 존재론에 앞선다(Ethics precedes ontology)'는 이론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상실해 가던 윤리와 도덕론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고, 서구 전통에 대한 비판은 후에 포스트모더니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여기까지 레비나스 개론을 정리했다. 훈련 받은 학자들처럼 레비나스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평범한 일반인으로서 이제 적어도 앞으로 책에서 “레비나스식으로 말하면~”라는 표현이나, 들뢰즈와 레비나스의 사유를 비교 조망했을 때 어떤 배경인지는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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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보충: 여기가 레비나스 철학의 미묘한 지점인데 약자를 자주 예로 들기는 하지만 “약자이기 때문에 호소한다”는 인과관계가 레비나스의 핵심은 아니다.. 오히려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내 앞에 있는 모든 타인’이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나에게 이렇게 나타난다. “나를 죽이지 말라.”“나에게 책임을 져라.” 이것이 ‘얼굴(face)’의 호소이다(그의 책에서 ‘얼굴‘도 지겹게 나온다). 이 호소는 상대가 실제로 힘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얼굴 자체가 윤리적 요구를 드러내는 것이다..